5일간의 치열했던 ‘청산리 전투’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얼마 전 100주년을 맞은
홍범도 장군 지휘 하에
일본군을 무찌른
유해진 류준열 주연의
‘봉오동 전투’ 영화가
관객 수 500만을 동원하면서
성공리에 마무리되었다.
오늘은 ‘봉오동 전투가 있은 후
같은 해 중국 길림성 화룡현 청산리에서
있었던 ’청산리 전투‘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시간은 1905년으로
거슬로 올라간다.
일제는 러일전쟁을 일으키면서
만주와 한국의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전쟁을 하게 된다.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경복궁을 포위하고
황제와 대신들을 겁박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을 체결하였다.
(한일협상 조약)
을사늑약의 조항은 다음과 같다.
제1조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감리, 지휘하며,
일본국의 외교 대표자 및 영사는
외국에 재류하는
한국의 신민 및 이익을 보호
제2조
한국 정부는 일본국 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는
국제적 성질을 가진
어떤 조약이나 약속도 하지 않는다.
제4조
일본국과 한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 및 약속을 본 협약에 저촉되지 않는 한
모두 그 효력이 계속되는 것으로 한다.
(영원한 식민지화)
일본의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면서
영원한 일제 식민지화를
꿈꾸게 된다.
하지만
일본의 불합리함에 대항하여
1907년 헤이그 특사
(이준, 이상설, 이위종)를
파견하였지만 결과는
좋지 못하게 끝났다.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고종은
강제 퇴위되면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즉위하게 된다.
이때부터 시작된
일제의 식민지화는
대한제국 백성들을
죽음의 길로 몰아넣었다.
수많은 백성들이 희생되면서
나라를 되찾기 위한
운동들이 벌어지게 되었고,
일제는 이를 저지해야만 했다.
수많은 선열들의 피가
일제의 심장을 겨냥하였고,
마침내 1919년 3.1일
일제의 식민지에 대항하는 만세 운동은
전국으로 번져나갔고
이 운동은 당시
전 세계 식민지 국가들의 영감이 되었다.
일제는 더 이상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을
지나칠 수 없게 되자
정규군을 선두로 하여
독립군과 전면전을 하려고 하였다.
다음 해인 1920년 6월 7일
드디어 봉오동에서 일본의 정규군과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 독립군이
전투를 하여 대승을 거두게 된다.
같은 해 10월 일제는
더욱 군대를 모집하여 진격하였고
청산리에서 드디어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장군의 휘하부대 대한독립군
및 연합군과 전투를 벌이게 된다.
5일간의 전투 결과
일제는 1200명이 넘는 사망자와
3300명이 넘는 부상자를
내면서 대패를 하게 된다.
청산리 전투가 가지는
의미는 매우 컸다.
처음으로 정규군과 전투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고
일제는 뒤로 물러서야만 했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했고,
국가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었다.
자신의 몸 하나로 부딪혀야만 했던
당시의 이야기를 돌아보면서
그들의 붉은 피가 오늘의 밝은 날을 만들었고
항상 감사하게 살아야겠다는
의미를 다시 한번 가슴 깊이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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