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6일은
국립 현충일입니다.
오늘은 현충일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국립 현충일은
자신을 희생하신 순국선열과
전몰한 분들을 위해 만들어진 곳입니다.
처음 지금의 현충원이 만들어지게 된 계기는
조국의 광복과 국토방위의 임무를 수행하여 오던 중
북한 인민군의 국지적 도발과
각 지구의 공비토벌작전으로
전사한 장병들을 기리기 위해
서울 장충사에 안치하면서부터였다.
하지만 전사자의 수가 계속 증가함에 따라
육군에서 묘지 설치문제가 논의되었고
1949년 말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에서
서울 근교에 묘지 후보지를 물색하던 중
6.25전쟁이 발발되면서
설치 문제는 중단되었었다.
계속되는 전쟁의 포화는
전사자의 수를 계속 증가시켰고
육군은 다시 묘지 설치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하였으며
다양한 후보지를 찾게 되는데
최종적으로 후보지를 선택한 것이
현재의 동작동 현 위치를
국군묘지 후보지로 선정하게 된다.
이승만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1953년 9월 29일에서야
국군묘지로써 확정되게 된다.
이듬해인 1954년 3월 착공을 시작하여
3년에 걸쳐 묘역 238,017㎡ 조성하고
그 후 연차적으로
광장 99,174㎡, 임야912,400㎡,
공원행정지역 178,513㎡를 조성하였다.
하지만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군인 위주의 국립묘지였고
6.25 전쟁 이후 많은
전사장병들의 처리를 위해
군묘지 안장 업무가
국립묘 지령으로 재정립되면서
애국지사. 경찰관 및 향토예비군까지
대상이 확되됨으로써
국가와 민족을 위해 고귀한 사람을 희생하고
아울러 국가발전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분들을 국민의 이름으로 모시게 되어
그 충의와 위훈을 후손들에게
영구히 보전, 계승시킬 수 있는
겨레의 성역으로써 국립묘지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한편 1979년 4월 1일
서울 동작동에 있는 국립현충원의
안장 능력의 한계에 따라
현재의 대전 현충원이 착공되어
같은 해 8월 29일 국립묘지관리소
대전분소로 출범하였다.
1991년 국립묘지 대전 관리소 승격을 거쳐
1996년 6월 1일 지금의 국립 대전현충원으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현재는 35만 기의 안장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문재인 대통령께서
2025년까지 54 만기의 안장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지원을 하시겠다고
2020년 6월 6일 현충일
추념사에서 말씀하셨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국가를 위해
희생하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는 바입니다.
국립 대전현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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