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드센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아픈 기억을 되짚어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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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아픈 기억을 되짚어보며...

정의기억연대 홈페이지 

얼마 전 위안부 할머니 중 한 분이신

이용수 할머니께서 정의연대(정의 기억 연대) 윤미향 전 대표에

대해 기자회견을 하면서

뜨거워진 위안부 관련하여 역사 사실을 한번 되짚어 보자

 

현재 한국에 위안부 할머니는 총 17분이 살아계신다.

일본군의 성 노리개로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고통과

지옥 속에서 살아남으신 분도

얼마 남지 않아 기억 속에만 남을 상황이다.

 많은 이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한분이 계신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첫 증언이 시작되면서

일본군 위안부가 수면 위로 부상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배봉기 할머니의 이야기다.

 

김학순 할머니 

(1914~1991) 배봉기 할머니는

1975년 처음 일본 교도통신을

통해 자신의 일본의 위안부임을 밝혔었다.

 

배봉기 할머니 

 

역사책에 나오는 일본군 '위안부' 사진 

한국의 젊은 여성들이

일본 헌병에 끌려가 성노예가 된 것은

19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일본은 시베리아 출병 때

7개 사단 가운데 1개의 사단이 성병환자로

골머리를 앓게 되는데 이러한 사태를 계기로

1931년 만주사변 당시에는

군용 공창가 즉 창가를 공식화하여 일본군이 가는 곳마다

여성들을 준비해두게 되었다.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일본군들을 위해서는 직접 찾아가기도 하였다.

초창기에는 군부와 결탁한 매춘업자들이 제공해주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보급장교들이 모집에 나서기도 하였다.

이때까지는 일본 처녀가 아닌

조선 처녀에게서는 강제성을 보이지는 않았다.

일본의 중일 경쟁이 장기화되면서

문제는 더욱 심각해져 갔다..

 

가장 심각했던 시기는

1941년 일본 관동군 24만 명을 75만 명으로 증원하면서

조선총독부를 방문 후

조선에 도라지꽃 2만 명을 요구하였고

강제로 끌려온 2만 명 중 1만 명이 관동군 쪽으로 끌려갔다.

위안부 여성에 대한 강제 차출은

다른 곳에서도 요구되어

타이완 총독부와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에서도

위안부 차출이 계속되었다.

 

일본군 위안부 연행 지역은 대체로

일본 본토 한반도와 중국 대륙 만주 

타이완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에서 차출하였다.

이외에도 네덜란드의 여성들도 존재하였다.

일본은 국적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여성들을 일본군 성적 노리개로 만들었고,

거짓 홍보와 일자리 미끼로 취업사기를 쳐서

데려가 매춘부가 아닌 이들이 대다수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몸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반 인륜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았던 만큼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돌아가신 분들이 상당수였다.

 

제2차

한국은 1945년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출현하면서

일본의 지난 36년간의 식민지 문제는 해결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수중 속에서 꿈틀거릴 뿐 수면 밖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본인들의 치욕적인 과거를 가지고 계셨던 분들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지만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자손들에게 말해주기 힘든 낙인을 남길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힘들었던 이야기를

본인들 스스로 삭혀나가야만 했다.

 

그러던 중 용기 내어 외친 피해자분들의

목소리가 인권탄압의 현장을 생생히 전달해주었고

문제는 국제사회로 번져나갔다.

 

현재 한국에는 17분의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살아계신다.

 

처음 본인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고

밝힌 240명도 이제는 17분밖에 안 남았다..

 

남으신 분들의 평균 연령이 이미 90세를 넘는다.

 

그들이 우리 곁을 떠나기 전에 억울했던

지난날의 지옥을 씻어드리기

위해 유가족 및 모든 국민들이 응원과 함께 노력을 해보자.

 

그 어떤 말보다 그들을 지지해주고

따뜻한 말 한마디가 그들에게

많은 힘과 용기가 되어줄 것이다.